2021년 5월 30일 1청년부예배 "주가 일하시네"
Notes
Transcript
-본문 : 사도행전 9장 1-19a(행 9: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까지)
-제목 : 주가 일하시네
선교사 Patric Johnstone “When we work, we work. When we pray, God works.”
우리가 일 할 때 우리가 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성도의 삶을 살아갈 때에 기도를 빼놓고 성도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하시며,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목적을 깨닫습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 말씀을 봅니다. 사도행전 하면 떠올려야 할 단어는 바로 “변화” 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할 때, 변화의 열매, 즉, 믿음의 열매를 보게 됩니다.
오늘은 이제 사도행전 9장으로 이어지는데, 사도행전 1장부터 인물을 중심으로 보면 1장부터 5장까지는 베드로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고 6장과 7장은 스데반 집사였고, 8장은 빌립 집사였습니다.
이제 9장부터는 변화되기 전의 바울이 등장하면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참고로 하나 정리하나 하고 갑시다. 설교나 신앙서적을 많이 듣거나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사울이 회심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근데 사실 정확하게 보면 사울이 변화하여 바울이 되었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부족한 말입니다.
왜냐면 사울과 바울은 각각 히브리식, 헬라식 음역 때문에 조금 차이가 난 것 뿐입니다. 바울도 스스로 자신이 변화하여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4절에서도 이렇게 나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예수님께서 바울을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바울 스스로가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도행전 26장 14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이것이 헬라식으로 음역하면 바울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변화를 이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전인격적인 변화와 그의 행하는 발걸음에서 알게 되는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단지 교회에 출석해서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가치관 나의 모든 행동과 말에 있어서 성령의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크리스천은 삶의 변화와 거룩한 방향성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하는 내용입니다. 먼저 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베냐민 지파이면서도 동시에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교사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전공한 엘리트였고, 심지어 유대교를 위한 열심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열정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가 유대교에 열심을 가진만큼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누구보다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본문 1-2절을 봅시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초대교회 당시에 바울의 존재는 어마무시한 큰 위협이었습니다. 정통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이었으며, 권세가 있고 심지어 로마시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본문1절에 보니깐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라고 하는데 이는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장기간에 걸쳐 죽이겠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뜻입니다.
실재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녔고, 사도행전 8장 1절을 봅시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길 정도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인들에게 사울은 큰 벽과 같은 존재입니다. 마치 쫓기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출구없는 벽과 같은 위협이 사울의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면 그 벽도 무너지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 51-53절을 봅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기도 하고, 하나님이 거두시기도 합니다.
더 주목할 것은 이러한 세상적인 위협과 어려운 환경이라는 벽도 누으면 다리가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주의 백성을 괴롭히는 벽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를 낮추시고 만나주시니깐 오히려 바울이 위협의 벽이 아니라 복음의 다리가 된 경우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을 제외하고 초대교회 당시에 가장 많이 쓰임 받은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50%가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제외하고 단연코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은 바울인데 바울은 처음부터 예수님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위협의 벽도 눕히면 다리가 됩니다. 어려운 환경의 벽도 오히려 다리가 될 때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예를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최대의 위기는 홍해 였습니다.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죽이려고 뒤쫓아오고 홍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이스라엘은 최대 위기를 맞습니다.
그런데 그 홍해도 하나님이 한 번 건드시면 갈라집니다. 길이 나서 오히려 생명을 구하는 다리가 되어버립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이 다 홍해를 건넌 이후에 홍해는 보호막이 되어버립니다. 갈라진 바다가 다시 합해서 뒤쫓아오는 애굽의 군대는 수장시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살기가 등등한 사울도 하나님이 일하시면 복음의 다리로 변화시킵니다. 본문 15절 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면 사울도 복음의 전도자가 되어서 크게 쓰임받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린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사울 같은 사람도 변화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우리 인생도 얼마든지 변화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수많은 벽들이 우릴 막아서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벽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 인생의 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불화가 인생의 벽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취업이라는 벽은 누구나 겪고 있을 것이고,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고 방황의 벽도 겪을 것입니다.
근데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인생의 벽! 하나님이 한 번만 건드리면 오히려 우리 인생의 다리가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릴 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제 인생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물질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조금 더 자유함이 있습니다. 왜냐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어릴 때보다 더 가난하진 않고, 오히려 이제는 다 컸기 때문에 그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겨낼만한 멘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과연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까? 가끔은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삶의 많은 어려움! 인생의 벽처럼 느껴지는 난관이 있을 때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그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할 그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봅시다. 이 부분은 참 익숙한 부분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많이 들었던 내용일 것입니다. 요약하면 사울이 예수님 믿는 자들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여정 중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사실 바울의 경험은 특별합니다. 개인의 경험이고 모두가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홀연히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예수님께 물었던 2가지 질문이 중요합니다.
본문 4-5절 봅시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첫째 질문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안 나오지만, 병행 본문인 사도행전 22장 10절을 보면 두 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사도 바울처럼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우리 영혼의 구원자, 우리 인생의 주권자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을 고민하게 되는데 그 방향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방법은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달란트대로 우리 인생을 선용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면에서 인생 전체를 흔드는 변화를 경험하고, 이전에 삶을 버리고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식과 방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하면 우리가 일한 것이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세상의 수많은 벽이 우리 앞에 어려움을 다가올지라도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 모든 1청년부 지체들이 이러한 기도의 능력을 믿고 성령충만함으로 변화된 삶을 누리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